장산도 방문을 위해서는 육지의 세 곳에서 배를 이용해야 한다. 가장 많은 사람이 이용하는 곳은 목포여객선터미널로 쾌속선(2항차)과 철부선(6항차)이 장산도를 거쳐 하의도까지 정기 운항하고 있다. 쾌속선은 40분, 철부선은 1시간 40분이 소요된다.
해남 우수영여객선터미널에서는 철부선(3항차)이 운행되고 있다. 목포에 비해 단거리로 40분이 소요된다. 안좌복호여객선터미널은 가장 인접하여 배로 15분 소요 되지만 저녁 1항차만 운항하고 있다. 배 운항시간은 계절과 날씨에 따라 변동되기 때문에 이용시 먼저 확인을 해야 한다.
철부선은 자동차 선적이 가능하나, 쾌속선은 사람만 승선이 가능하다.
현재 장산도 주미의 대부분은 임진왜란 이후에 이주한 사람들의 후손이다. 오랫동안 다도해의 행정 중심지 역할을 했던 장산도이지만, 고려말 조선 초기의 극심한 왜구의 침탈에 대한 소극적 대책으로 섬에 살던 사람들을 육지로 강제이주 시키는 공도정책으로 한동안 사람이 살지 않았다.
해안지역이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던 조선 전기 세종 때부터 사람들이 이주하기 시작했으며, 조선 중기 이후 전쟁의 혼란이 잠잠하게 되자 본격적으로 섬에 많은 사람들이 유입됐다. 당시 이주한 성씨는 수원 백씨, 김해 김씨, 경주 정씨, 전주 이씨, 경주 최씨, 인동 장씨 등이다. 이들이 섬에 들어오면서 장산도 안에 30여 개의 마을이 생겨났다.
섬에 인구가 늘어나자 사람들은 간척으로 토지를 넓히기 시작했다. 장산도는 만 입구를 막으면 그 내부를 토지로 확보할 수 있어 간척하기에 적합했다. 특히 임진왜란, 병자호란 이후 급감하게 된 농지확보를 이해 17~18세기부터 대규모 간척지가 조성되었으며, 섬으로 이주한 일부 사람들은 간척사업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기도 했다.
- 마을이름 유래
오음리(五音里) : 다섯 봉우리로 된 오음산 아래에 있다. 예로부터 노래를 잘하는 명창이 배출된 고장이라하여 오음리라고 불렸다. 오음, 북강, 한샛골, 후포, 시미, 죽두 마을이 있다.
대리(大里) : 섬의 중앙에 있는 마을로 예로부터 마을이 크다 하여 큰몰, 큰말, 큰 동네라고 불렸다. 대리, 창촌, 모계, 삼방마을이 있다.
도창리(道昌里) : 옛날 조세와 환곡을 보관하던 창고가 있어서 도창리라 불렸으며, 현재 면소재지이다. 도창, 사창, 두동마을이 있다.
공수리(公壽里) : 고려시대 공수전 토지가 있어 공수촌, 공수라 하였고 면 소재지 동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동면이라 불렸다. 또한 마을에서 볼 때 뒷산인 두학산이 양손을 두르고 있는 형국이어서 공수(公手)라고 하였으나 지금은 공수(公壽)라 한다. 공수, 마초, 중산, 비소마을이 있다.
팽진리(彭津里) : 마을 앞에 팽나무 군락지가 있었고, 나루터가 있어 팽진, 팽나리, 팽나루라고 불렸다. 팽진, 중룡, 두루메, 궁항, 상룡, 하룡, 사근마을이 있다.
다수리(多水里) : 마을 뒤에 있는 대성산 숲이 울창하고 사시사철 물이 많이 흘러서 다수동, 다수라 불렸다. 다수, 어도, 성주골, 통두, 신촌, 월산마을이 있다. 다수리에 있는 다수항은 장산도 유일 지방어항이다.
마진리(馬津里) : 마을 뒷산의 바위가 말의 모양이라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마진, 율도마을이 있다.